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움베르토 2세 (문단 편집) === 정체 논쟁과 즉위 === 부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과 [[제2차 세계 대전]]을 용인했기 때문에 종전 후 [[사보이아 가문|사보이아 왕가]]에 대한 여론은 최악이었다. 이에 [[좌파]]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통일]] 당시부터 존재했던 [[공화정]] 수립 여론이 다시 크게 고개를 들었다. 이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개인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주장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솔리니 정권 대부분의 기간 동안 그 정권에 협조했으며 물질적 안락을 누리며 생활한 왕실 전체에 책임을 묻는 차원에서 나온 주장이기도 했다. 사보이아 왕가는 전쟁 말기 연합군 본토 진공 작전 시기에 이르러서야 무솔리니를 버렸으며, 이는 [[사회정의]] 차원에서라기보다는 왕실과 구(舊) 체제의 보전을 위해서였다. 특히 무솔리니 정권 대부분의 기간 동안 불법화되어 탄압받았던 [[이탈리아 사회당(1892년)|이탈리아 사회당]][* 파시즘 정권 시기 [[이탈리아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불법화되어 탄압받았다. 전쟁 전에는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반(反) 파시즘·반(反) 정부 활동을 조직하는데 주력했고, 전쟁 기간 동안에는 공산당과 함께 [[레시스텐자]] 활동 조직에 앞장섰다. 무솔리니 집권 전에도 [[국가 파시스트당]] 당원의 백색테러에 많은 피해를 입었고, 무솔리니 집권 중 전쟁 전에도 수 천 명 당원들이 수감당했으며, 전쟁 기간 동안에는 많은 당원이 [[파시스트]]와 [[독일 국방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전후 사회에 대한 구상에 있어 공산당과 차이가 있었지만, [[파시즘]]에 대한 증오와 왕가에 대한 반감에 있어서는 공산당과 별 차이가 없었다.]과 [[이탈리아 공산당]] 및 그 지지자들은 파시즘뿐만 아니라 왕정에 대한 반감도 극심했다. [[이탈리아 사회당(1892년)|사회당]], [[이탈리아 공산당|공산당]], 노동민주당, [[행동당(이탈리아 1929년)|행동당]] 등 [[좌파]]가 주도하는 공화정 추진 세력은 공화정 수립을 실현하고자 왕가를 [[파시스트]] 협력자로 비판하고 이 기회에 왕정을 폐지하자며 개헌 [[국민투표]]를 추진했다. 사회당과 공산당 등 좌파의 공화정 여론은 [[이탈리아 통일]] 당시부터 있었던 것이라 그리 놀랄 것은 없었지만, 전쟁 후에는 전통적으로 왕당파였던 우파 안에서도 공화정에 호의적인 여론이 늘어났다. [[기독교민주당(이탈리아)|기독교민주당]] 내 [[자유주의|자유주의자]]들은 [[좌파]]만큼 국민투표 추진에 적극적이진 않았으나 반대하지도 않았으며, 특히 1946년 4월에 [[기독교민주당(이탈리아)|기독교민주당]] 당원의 상당수가 공화정을 선호한다고 답해[* 당시 당원의 60%가 공화정을 선호했고 17%는 왕정을 선호했으며, 23%는 입장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왕가와 왕당파에 큰 충격을 줬다. 당시 기독교민주당 소속 총리 [[알치데 데 가스페리]]도 자신이 수장을 맡고 있는 [[거국내각]][* 사회당과 공산당이 거국내각에 입각해 있었다.] 내 개헌 국민투표 제안에 동의했다. 개헌 국민투표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는데,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할 것이냐 아니면 왕정을 유지하느냐는 것이냐였다. 움베르토 2세는 사보이아 왕가 일원 중에서 그나마 전쟁 뒷수습을 위해 노력한 편이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달리 왕당파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왕실과 왕당파는 우파 내에서도 왕정에 냉담한 여론이 굉장히 크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 퇴위를 종용했다. 결국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왕정 유지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 움베르토 2세에게 [[양위]]하고 본인은 [[이집트 왕국|이집트]]로 망명했다. 움베르토 2세는 물론 왕정 유지를 주장했지만 개헌 국민투표 자체는 수용했고 [[이탈리아인]]의 민의에 따르겠다고 공언했다. 움베르토 2세는 왕정 지지 성향이 강한 [[가톨릭 교회]]와 남부 지역 지지를 등에 업으면 개헌 국민투표에서 약간의 표차로 승리해 왕정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움베르토 2세는 즉위 즉시 대규모 [[사면]]을 단행하고 이집트를 국빈 방문하는 등 개헌 국민투표 및 [[총선]] [[선거운동]] 동안에도 왕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탈리아 사회당(1892년)|이탈리아 사회당]], [[이탈리아 공산당]], 노동민주당, [[행동당(이탈리아 1929년)|행동당]] 등 [[좌파]]는 당연히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에 적극 찬성했고, [[중도주의|중도]] 성향 [[기독교민주당(이탈리아)|기독교민주당]]은 당내 [[왕당파]]가 적지 않아서 당 차원에서는 중립을 지켰으나 당 내 자유주의자들[* 후에 '기독교민주당 좌파'로 지칭되는 세력이 된다.]을 중심으로 공화정 수립 찬성 여론이 일었다. 왕정 유지 측에서는 자유국민블록(Blocco Nazionale della Libertà)[* 개헌 국민투표와 같은 날 치러진 1946년 총선에서 2.77%를 득표하고 16석을 획득했다.] 등 노골적 우익 왕당파 정당·가톨릭 교권 세력·일부 [[파시스트]] 잔당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전개했고, 구체적인 지지 정당을 떠나 [[남부]]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움베르토 2세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왕정 지지를 호소했다. 그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왕정 지지를 호소할 때 남부에서는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북부에서는 면박·야유를 보내거나 심하면 살해 협박을 하는 등 대체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개헌 국민투표 유세 중 공화파와 왕당파 둘 다 네거티브 전술을 사용하였다. 공화파 일각에서는 움베르토 2세를 [[동성애자]][[호모포비아|라고 인신공격해서]] 보수적인 왕당파 표심에 영향을 주고자 했고, 왕당파 일원이었던 가톨릭 교회에서는 [[레드 컴플렉스|'가톨릭 VS 공산주의' 프레임을 씌워]] 표심에 영향을 주고자 했다. 당시 교황 [[비오 12세]]는 투표 전날 직접 [[성 베드로 광장]]에 나가 왕정 지지를 호소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